소개
■ 대고포[大羔浦]마을
삼도수군통제영 당시 산 능선 사이로 깊숙하게 들어앉은
이 개에서 군수용 소금을 구워 공급한 염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염포(鹽浦-염개)라 불렀으며 그 후 자리를 잡고
살아온 선인들이 소금 염의 염개보다 염소와 양이란
뜻의 고양(羔羊)에서 고(羔)자를 따서
고포(羔浦)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961년에
대고포와 소고포로 분동되었다.
**고양(羔羊) : 어린양
■ 장곡[長谷]마을
장곡마을은 장곡 본 마을, 독암마을, 벌통골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의지혈을 타고 났다는 명지(名地)로 임진왜란 당시 망산봉수대의 신호를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에 직접 전달한 당산봉수대가 있었다.
장곡이라 함은 마을 뒤에 긴골짜기(長谷, 장골)가 있어 여러 군영에 필요한 숯과
연료를 만들어 공급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독암마을은 우리수군에 필요한 질그릇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도간바우라 불리기도 하였다. 산수가 좋고 산림이 우거져
벌통을 많이 놓고 길렀다는 벌통골이 있으며, 마을앞에는 유자섬이 있다.
■ 창동[倉洞]마을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 당시 약 3,000석 가량의
군량미를 비축했던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창동(倉洞)이라 불리게 되었다. 전쟁 중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와 인근 각처에
둔전(屯田)을 일구게 하여 여기서 생산된 수천석의
군량을 이곳 곳간에 쌓아 놓을 수 있었다.
■ 입정포[立定浦]마을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의 전선들이, 왜적의
습격에 대비하고 적선을 발견하여 공격하기 위하여
이 일대의 해역을 초계(哨戒)하다가 이곳에 일시
입항하여 정박한 곳이라 하여 입정포(立碇浦)라
하였으며, 또 우물이 좋아 이 물로 정화수로 사용하고,
가뭄에 한산도 모든 마을에 물을 공급했다고 하여
입정포(立井浦)라 부르기도 하였다.
■ 진두[津頭]마을
진두란 지명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 수군이 진을 치고
경비초소를 두어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과의
연락 및 담당구역의 해상경비 임무를 수행하였던
곳이기에 진두(陣頭)라고 쓰기도 하고, 또한 예부터
한산도와 추봉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연결하는
나루터였기에 진두(津頭)라고 쓰기도 한다.
■ 야소[冶所]마을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각종 병장기 (兵仗器)를 생산하기 위하여 풀무간
(대장간)을 설치하고, 쇠를 녹여 병장기를 제조,
수리하였던 곳으로 풀무란 뜻의 한자인 야(冶)를
따서 야소(冶所)라 일컫게 되었다.
오늘날의 병기창(兵器廠)이 있었던 곳이다.
■ 의암[衣岩]마을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에 주둔한 수군들의
군복을 짓고 수선하는 피복창이 있었고, 마을이
정남방(正南方)이여서 어느 곳보다도 일조 시간이
길고 앞 바닷가에는 거대한 바위들과 넓은 몽돌밭이
있어 수많은 군복을 빨래하여 널어 말렸다 하여
옷바위(衣岩)일컬어진 지명이다.
■ 하포[荷浦]마을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당시 이곳에다
보급창을 두고 각 진영에 보급할 군수물자의 조달과
보관 및 보급에 관한 일을 보도록 하였으며,
병참(兵站)지원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각지에서 조달해온 군수물자와 각 진영에
보급할 물자를 어깨에 메고 싣고 풀었다 해서
멜개 또는 하포(荷浦)라 부르게 되었다.
■ 장작지[長作支]마을
삼도수군통제영(현 제승당) 당시 수군이 진을 치는 해상훈련을
했던 곳이라 해서 진작지(陳作支)라 불렀으며, 거북선을
주축으로 하는 통제영의 수군들이 이순신 장군의 진도(陣圖)에
의해 학익진(鶴翼陣)등의 각종 진법을 연습했던
곳이다. 장작지(長作支)라 함은 진작지(陳作支)
에서 별칭인 장흥(長興)의 긴 장(長)자를 따서
장작지라 불리게 되었다.
■ 의항[蟻項]마을
한산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의 잔적(殘敵)들을 우리 수군(水軍)은
끝까지 소탕하기 위하여 이곳 두억개(頭億浦, 제승당개)로 유인
하였으며, 문어포에서 도망갈 물길이 트였다는 말에 속은 왜군들이
막상 여기까지 몰려들어 왔으나 수로(水路)가 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자 산허리를 뚫고 도망가기위하여
개미떼처럼 엉겨 붙어 파놓은 지형이 개미허리
모양 같다 하여 의항(蟻項)이라 부르게 되었다.